메뉴

'22년만의 컴백' 정혜선 "자신에 대한 믿음-용기, 유니크함으로 승부하세요"

뜻밖에 '경단녀의 희망'...1인기획사 차려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뚜벅뚜벅

 

경력단절여성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어쩌면, 원체 진입장벽이 높은 예술 분야 ‘경력단절’은 극복하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특히,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소위 ‘인기’와 ‘사랑’을 먹고 자라는 대중문화 분야는 ‘경력단절’을 메꾸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그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것도 무려 22년 만이라면? 잠깐 활동하고 ‘은퇴’ 혹은 ‘활동중단’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이들이 숱하게 많은 가요계에서라면 눈에 번쩍 띄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힘든 일’을 혼자서 거뜬히 해낸 이가 있다. 바로 가수 정혜선이다.

“그 동안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걸 어떻게 참았냐고들 하세요. 전 직진스타일의 제 성격을 아니까 스스로를 꽉 묶어놨어요. 곡 쓰면 녹음 하고 싶어지고 그럼 또 어떻게든 녹음해서 앨범을 만들 거라는 걸 아니까. 지난 20년 간 아내와 엄마로서 가정에 충실한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하지만, ‘20년 참았으면 됐다’ 싶었어요.(웃음)”


 

‘경력단절’ 22년 만에 컴백...제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은상 수상자

이 대목에서 정혜선, 누구지?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출전자격이 제한된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제1회 은상 수상자다. 이 대회는 싱어송라이터의 산실이자, 조규찬, 고찬용, 강현민, 유희열, 심현보, 말로, 이규호, 이한철, 방시혁, 나원주, 정지찬, 스윗소로우, 정준일 등 걸출한 음악인들을 배출한 바 있다.

정혜선은 1989년 대학생 시절 교내에서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한 달간 급히 통기타를 배우고 노래를 작곡해 대회에 출전, ‘나의 하늘’로 덜컥 입상을 했다. 이를 계기로, 외국 팝음악 감상을 좋아하던 평범한 여대생은 무대에 서게 되고 당시 조동진의 눈에 띄어 그가 이끄는 음악 레이블 ‘하나음악’(현 푸른곰팡이) 1호 앨범의 주인공이 된다.

1992년 ‘오 왠지’ ‘해변에서’ 등이 담긴 정혜선 1집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음색과 창법, 음악적 색깔로 평론가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특이하게도 사진작가 김중만의 제작으로 2집을 준비하게 된다. 1994년 작업이 완료되고 음반이 시중에 유통되기 직전 방송국 등에 사전 홍보용 CD까지 배포했던 2집은 안타깝게도 시판되지 못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그녀는 결혼, 육아 등으로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하고 엄마와 아내로서의 삶에 충실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세상에 나온 정혜선의 단 한 장의 앨범, 1집 LP와, 일부 관계자들에게 배포된 홍보용 CD가 이후 음반수집가들의 표적이 됐다는 점이다. 실제 그의 1집 LP와 2집 프로모션용 CD는 몇 십 만원을 넘어 거의 10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로 거래되곤 했다.

“지난 20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소수지만 아직 저를 기억하는 팬들이 있고, 또 제 예전 앨범들이 몇 십 만원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불과 몇 년 전에 알게 됐어요. 음원도 제대로 공개돼 있지 않아 제 팬들이 황학동 시장이나 중고사이트 등을 뒤진다는 얘길 듣고, 그 분들이 원하는 음원을 들을 수 있게, 또 음반도 몇 십 만원이 아니라 몇 만원에 구할 수 있게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용기를 내서 어쩌면 무모할 수 있는 도전을 하게 됐죠. 더 늦으면 안되겠다, 내 자신에게도 불성실하고 또 팬들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안되겠다 싶었어요.”

 

 

‘20년 공백 맞아?’ 작사-작곡부터 앨범 제작-콘서트까지 일사천리

봉인이 해제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우선 2017년엔 쉽게 구할 수도 들을 수도 없던 1집과 2집을 리마스터링해 새 싱글과 함께 공개했다. 그리고 첫 단독 공연도 해냈다. ‘대중들이 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무감이 먼저였고 ‘본격적 게임은 2018년부터다’라고 스스로 다짐한 터였다.

“많은 분들이 ‘20년 쉬었으니까 그간 축적해 놓은 곡들이 꽤 있겠네’ 하셨는데, 전혀요. 전 곡을 써서 오래 쟁여놓는 스타일이 아니에요.(웃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순 있는데, 전, 그때그때 새롭고 신선한 음악을 갖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컴백한다’ 마음을 먹고 바로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작년 초부터 곡을 쓰고 봄과 여름에 열심히 녹음을 했다. 가을에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쳐 뮤직비디오까지 찍어 지난 12월부터 2월까지 세 달에 걸쳐 정규 3집 파트 1, 2, 3를 내고 이 곡들을 다 모아 CD와 LP로도 발표했다. 여기에 지난 16일에는 홍대앞 롤링홀에서 단독 콘서트까지 성황리에 마쳤다. 한정판으로 발매된 LP는 공개되자마자 또 품절사태가 났다.

“결과적으로 저도 1인 기획사로 창업을 한 셈인데, 창업은 정말 모든 분야가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기존 소속사를 두드려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근데 제 음악이 워낙 개성이 강하니까 (타 기획사에서) 이걸 수용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녹음을 하고 공연까지 합 맞추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인 기획사라 해도 요소요소 순간순간 적재적소에 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책임은 그 자신이었기에 모든 선택과 결정은 정혜선의 몫이었다.

“기쁘게 시작해 열심히 하고 있는데 1인 기획사다보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일이 많고 제가 다 결정해야 한다는 게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책임감이 강한 스타일이다 보니 또 질이 좋아야 되고(웃음)... 콘서트도 처음엔 소규모로 해야지 했다가 결국 풀 밴드 세션으로 하고 대극장 무대가 아님에도 영상까지 신경 써서 만들게 되고... 근데 제가 워낙 솔직하고 전투적인 스타일로 일단 부딪치다보니까 하나하나 풀리더라고요.”

 

 

어느새 신곡 6~7곡...‘도전’에 필요한 건 믿음과 용기 그리고 유니크함

‘예측불허’ ‘반면교사’ ‘소용돌이’ ‘공기질’... 3집 수록곡들은 제목만 봐도 특이하다. ‘알랭 드 보통’ ‘푸틴’ ‘콩고물 아이스크림’ ‘비애적 뉴스’ 등 심상치 않은 단어가 등장하는 가사들도 흥미롭다. 독특한 음색과 창법은 말할 것도 없다.

“1집 냈을 때 ‘음악이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말 때문에 지금 나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엔 이상하다 싶은 음악도 요즘엔 멋있다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랄까, 배짱이랄까. 이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제 음악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뭐, 아니면 말고~ 이런 마음도 있었고요.(웃음)”

참 오래 걸리고 용기도 필요했지만 일단 다시 시작을 하니 눌렀던 창작욕구도 분출했다. 3집 작업을 하는 와중에 신곡 6~7곡이 뚝딱 만들어졌다. 여건만 된다면 올해 안에 4집도 완성할 기세다. 물론, 현실적으로 정규 앨범이 금세 뚝딱 나올 수는 없는 일이고, 아마 올해 안에 한 두곡 녹음을 진행해 디지털싱글 형태로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구상 중이다.

“너무 오래 쉬었는데, 누가 주셨는지는 모르지만(웃음), 또 대단한 게 아닐 지도 모르지만, 아직 창의력, 창작 재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문득, 누군가 그녀를 ‘경단녀의 희망’이라고 표현한 게 생각났다. ‘경력단절여성들이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때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정혜선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어떤 분야가 됐든 자기만의 유니크한 실력과 차별점,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유니크함, 누구나 유일의 존재이지만 차별화된 실력과 노하우를 갖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터다. 그런 그녀는 그래서 22년이라는 짧지 않은, 아니 꽤나 긴 공백, 경력단절에도 당당히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제라스타엔터테인먼트


헤드라인



배재형 발행인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