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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화제작 모두 제손 거쳤죠...창작품 꼭 성공시키고파" 김향란 뮤지컬파크 대표

샤로수길 수제맥주전문점 주인장 역할도..."일생이 투잡러예요"

 

일생이 ‘투잡러’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영어과외를 했고, 지금도 공연기획자이면서 ‘샤로수길’(낙성대역~서울대입구역 사이 핫로드) 수제맥주전문점인 '컵스'의 주인장이기도 하다.

공연기획사 뮤지컬파크 대표 김향란. 이국적 외모의 그는 1980년대 말 이미 여자대학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첨단’ 직장 중 하나였던 광고대행사의 AE, 삼성영상사업단 홍보마케팅/공연기획 담당 등 당대 문화 트렌드를 이끌어가던 최전방 일터에서 일했다. 전공도 영문학, ‘운명의 동반자’인 남편은 재즈 피아니스트 론 브랜튼, 그야말로 ‘버터 냄새’ 팍팍 나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전형일 것만 같은 배경과 이력을 지녔다.

“전남 강진을 아시나요? 그야말로 시골이고 학교보다 밭일을 먼저 해야 했어요. 시골에서 어찌어찌 공부를 좀 해서 고등학교는 광주로 나와 자취하며 다녔어요. 그때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냉방에서 잘 챙겨먹지 못한 게 평생의 건강을 좌우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학습능력도 또 건강도 타고나는 것인지, 김향란 대표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무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 서울로 입성한다. 그러나 ‘시골소녀’가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낯선 환경과 약한 체력 때문인지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준비 없이 그야말로 ‘어리바리’ 대학 4년을 보냈다고. 그리고 지도교수의 소개로 출판사에 취직, 2년 가까이 영어잡지를 만들었다.

영어잡지사서 광고대행사 거쳐 삼성영상사업단 기획자로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는, 당시 '트렌디한 직장의 대명사' 격인 광고대행사로 옮겨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광고팀, 그리고 상사를 따라 PR팀에서 AE로 일하게 됐다. 그렇게 글로벌 감각과 문화적 감수성, 마케팅 능력을 키운 후 삼성전자 소속 나이세스(이후 삼성물산 ‘스타맥스’, 제일기획 ‘오렌지’ 레이블 등과 ‘삼성영상사업단’으로 통합. 지금의 CJ ENM 같은 회사가 일찍이 1990년대에 명멸했다고 이해하면 빠르다-필자 주)로 스카우트된다.

“삼성전자 ‘나이세스’로 시작해 ‘삼성영상사업단’까지 만 5년을 일했어요. 당시 획기적 시스템이었던 삼성영상사업단이 좀더 오래 지속됐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쉬워요.”

삼성영상사업단은 음악-영화-공연 기획-제작-배급까지 ‘원스톱’으로 진행하는 ‘대중문화계 공룡’이었다. 다양한 분야, 조직에 있던 다채로운 인력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려고 하는 참이었다. 김향란 대표는 그곳에서 음악, 공연사업부에서 일을 했다. 결국 성사되진 못했지만, 막 성장을 시작하려던 국내 뮤지컬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는 해외 뮤지컬의 국내 상륙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리고 해외 유명 프로듀서, 기획사들과의 접촉과 소통을 담당한 것이 김 대표였다.

의욕적으로 출범한 삼성영상사업단이 오래 가지 못하고 ‘실업자’ 신세가 된 김향란 대표는 ‘이 김에 쉬어가자’ 싶었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어쨌든 1990년대 중반은 김 대표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시기였다. 삼성영상사업단의 퇴장과 또 다른 시작, 인생 동반자와의 운명적 만남과 결혼 등.

재즈 피아니스트 론 브랜튼과의 영화 같은 만남...소속뮤지션 대 공연기획자

김향란 대표와 ‘영원한’ 소속 뮤지션 론 브랜튼(Ronn Branton)의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는 업계에서 꽤 유명하다. 중-고교 시절 영어에 흥미가 많았던 김 대표는 당시 청소년들의 유일한 외국과의 연결고리 ‘해외펜팔’을 하던 진취적 여학생이었다. 실제, 1970년대 말 80년대 초 학생잡지를 보면 해외펜팔 광고가 늘 지면을 장식했다.

“해외펜팔의 추억과 경험이 있다 보니 삼성영상사업단 시절 같은 삼성 계열사 PC통신 ‘유니텔’ 채팅방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해외 매칭사이트와 링크돼 있었더라고요. 그곳에서 세 명의 남성과 연결이 됐는데 가장 글을 잘 쓴 남성의 메시지에 응답,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 됐어요. 하하. 당시 '인터넷 국제커플 1호'라고 보도도 많이 됐었죠.”

어쩌면 숱하게 많이 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남편과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하며 김향란 대표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공연기획자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만남이라니, 그 자체로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론 브랜튼은 뮤지컬파크의 소속가수이고 김 대표는 그의 매니저 겸 공연기획자, 소속사 대표인 셈이다. 이들 부부의 시너지가 멋지게 발휘된 것이 ‘론 브랜튼의 재즈 크리스마스’ 콘서트다. 작년 12월에 18회째 공연을 마쳤고 올해 19년차, 내년엔 20주년을 맞는다. 18년간 연속 매진을 기록했고 올해 공연을 거쳐 내년 20주년 콘서트를 잘 치루는 게 중요한 계획 중 하나다. 그야말로 ‘그 여자 기획, 그 남자 공연’이다.

“남편 공연이 잘 되다보니까 작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간 부산, 울산, 대구, 대전 등 주요 도시에서 다 공연을 했는데 정작 고향인 광주에서는 한 번도 못하다가 드디어 작년에 무대에 올려 다른 도시보다 더 대박 났어요. 광주지역 공연제작사에 제안서, 기획서 다 보냈는데 진행이 지지부진해 ‘이럴 거면 내가 직접 해야겠다’해서 ‘아시아문화의전당’에 대관 신청하고 ‘고향이니까 혹시 잘 안되더라도 GO~’ 했는데 공연이 잘 돼서 더 기뻤어요.”

현재 미국에서 오페라를 공부 중인 딸 도연이도 이 부부의 더 없이 멋진 작품이다. 이제 1학년인데 선배들도 서기 힘들다는 학교 오페라에 캐스팅 되는 등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기대주다. 론 브랜튼과 함께 이 신진 아티스트를 대한민국의 예술자산이 될 수 있게 잘 키우는(?) 것도 김 대표의 주요 과제이자 계획이다.

한국 뮤지컬 새 장 여는데 역할...창작뮤지컬 성공시키고파

김향란 대표의 이력에서 빼놓은 수 없는 건 초대형 해외 뮤지컬을 국내에 들여와 한국 뮤지컬의 새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2001년 라이선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책임 프로듀서를 맡아 그야말로 ‘초대박’ 흥행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나라 뮤지컬 역사를 바꿔놓은 대 사건’이라 할 만한 것으로 매출이 200억에 달했다고. 이후 ‘캐츠’ ‘사운드 오브 뮤직’ ‘42번가’ ‘미녀와 야수’ 등을 잇달아 국내 무대에 올리며 해외 뮤지컬 열풍을 일으켰다.

“삼성영상사업단 시절에 이미 네트워크를 다져놓았기에 가능했어요. 처음 ‘오페라의 유령’의 경우 라이선스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협상만 1년이 걸렸을 정도로 까다로운 프로젝트였죠.”

그도 그럴 것이 대작으로서 원작회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해외 제작진이 다 내한해 공동프로듀서까지 맡았다. 해외 초대형 뮤지컬을 한국배우, 한국어로 만들겠다는 건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수많은 해외 뮤지컬들이 국내에 라이선스로 소개되기까지 김향란 대표의 현지와의 연락과 소통, 계약 성사 등 물밑 노력이 있었다. 오랜 커리어를 통한 전문성과 뛰어난 영어실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어우러진 결과다.

요즘 김향란 대표는 숨고르기 중이다. 엉겁결에 시작해 어느새 오픈 4년 차를 맞은 ‘컵스’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지키며 ‘소속 뮤지션’ 론 브랜튼을 비롯해 케이클 싱어즈 등의 공연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자살예방콘서트’ 같은 뜻깊은 취지의 공연에도 힘을 쏟고 있다.

“‘컵스’를 운영하면서 요즘 자영업자의 고충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작년 하반기부터는 심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냉각됐다고 할까요. 아예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은 것 같더라고요. 처음 출발부터도 큰 욕심을 내진 않았지만 요즘 같아서는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공연기획은 제 평생의 업인 셈인데요. 역시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지만 ‘나만의 콘텐츠’는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5년 이상 준비한 창작 뮤지컬 ‘타이거’를 무대에 짧게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걸 꼭 다시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쌓은 제 노하우들을 무료로 나누는 뮤지컬 컨설팅도 해나가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오픈 전부터 손님이 막 들어선다. “원래 공연 때문에 굉장히 바쁘거나 ‘오늘 손님 없으면 빨리 들어가야지’ 할 정도로 녹초가 돼 있을 때 어떻게 아셨는지 많이들 오신다”며 김향란 대표는 빠르게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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