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쁨' 아이돌의 대표주자 김우석이 뷰티플랫폼 '왈라뷰' 첫 모델로 발탁됐다. 세종텔레콤의 V-커머스 뷰티플랫폼 왈라뷰(wallaVU)는 새로운 브랜드 캠페인 ‘듣도보도 못한 뷰티’ 전개를 예고하며 가수 김우석을 모델로 발탁했다고 17일 밝혔다. 왈라뷰는 자신의 개성과 가치관을 자유롭게 발산하고 스트리밍 라이프를 즐기는 MZ(밀레니얼+Z세대)세대를 겨냥한 영상 기반의 뷰티 커머스 플랫폼이다. 하나의 여가로서 MZ세대의 일상이 된 뷰티 콘텐츠로 재미를 더하면서 제품 발색 및 제형 테스트, 메이크업 튜토리얼 등을 통해 정확한 제품정보와 경험 제공으로 구매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번 ‘듣도보도 못한 뷰티, 왈라뷰’ 캠페인은 자신만의 가치를 표현하는데 익숙한 ‘요즘 아이들’의 뷰티 일상과 ‘듣도보도 못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브랜드 캠페인을 대표하는 얼굴로 다재다능한 매력의 남자 아이돌 김우석을 전속모델로 발탁했다. 왈라뷰가 제안하는 ‘듣도보도 못한’ 메이크업 콘셉트에 김우석의 자기주장 뚜렷한 이목구비와 무결점 피부, 변화무쌍한 매력이 담긴 영상과 사진들이 곧 공개될 예정이다. 왈라뷰 관계자는 "김우석은 왈라뷰의 첫 모델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브랜드 핵심 타깃인 Z세대들 사이에서 특히 각광받고 있으며 뷰티모델로서 최적의 비주얼과 이미지를 갖고 있다"라며 "웹드라마 ‘트웬티트웬티’ 출연과 솔로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자신만의 영역을 다져가는 김우석의 팔색조 매력과 잠재력이 왈라뷰가 전하고자 하는 밝고 역동적인 ‘그들만의 뷰티 라이프’에 완성도를 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종텔레콤의 커머스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김성훈 이사도 “마켓플레이스, 영상 프로덕션, 풀필먼트 센터 구축 등 다양한 분야로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는 왈라뷰가 여러 분야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김우석의 끝없는 매력과 만나 폭발적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왈라뷰가 단순 쇼핑 공간이 아닌 MZ세대를 대변하는 뷰티 콘텐츠 서비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한다”고 전했다. 사진=세종텔레콤 왈라뷰
할리우드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한국 관객들에게 코로나19 극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최근 개봉한 '건즈 아킴보(Guns Akimbo)'의 주연을 맡아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한국 관객들에게 개봉 기념 인사 영상을 보내 시선을 모은다. 16일 CGV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된 영상 속에서 그는 "'건즈 아킴보'가 15일 CGV에서 개봉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라고 개봉 소감을 전하고 "전 세계가 어려운 시기인만큼 이 영화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길 바랍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감사합니다!"라고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로해 주목을 끌었다. '건즈 아킴보'는 댓글 하나 잘못 달았다가 양손에 권총이 박제된 채 실제 목숨이 걸린 살인 게임에 강제 참여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다. '어벤져스' '더 울버린' '호빗' 시리즈의 시각 효과를 담당한 제이슨 레이 하우덴 감독의 연출로 참신한 상상력과 화려한 영상미가 더해진 웰메이드 스타일리시 액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존 윅' '메이즈 러너' 등 액션 영화 제작진들이 합세해 시너지를 이루며 제44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52회 시체스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돼 완성도를 입증했다. 아울러 '해리 포터' 시리즈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존 윅' 제작진의 만나으로도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사진=도키엔터테인먼트
임성현 전 코오롱모터스 대표가 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 더클래스 효성㈜의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임성현 신임 대표이사는 1988년 코오롱그룹에 입사해 ㈜코오롱 기획실, 코오롱글로벌 ANC사업부 본부장을 거쳐 코오롱모터스 대표를 역임하며 수입 자동차 업계의 발전과 판매 신장을 이끌어왔다. 더클래스 효성은 이번 대표이사 선임에 대해 “임성현 대표이사는 그동안 수입 자동차 업계에서 다양한 성과를 거두며 쌓아온 전문성과 증명된 리더십을 바탕으로, 더클래스 효성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고객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더클래스 효성은 임 대표이사를 필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르세데스-벤츠 딜러사를 넘어 글로벌 No.1 딜러사로 지속 성장하겠다는 계획이다. 임성현 신임 대표이사는 취임 메시지를 통해 “지난 2003년부터 메르세데스-벤츠와 함께 고객에게 프리미엄 라이프를 선사해온 더클래스 효성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돼 영광”이라며 “앞으로 고객만족을 위한 지속적 투자와 마케팅을 통해 고객의 신뢰에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임성현 대표이사는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스페인문학을 전공했으며,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 구사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더클래스효성(주)
이미경 코이카 이사장이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준비를 강조했다.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는 10일 서울대 코로나연구네트워크(SNUCRN)와 공동주최한 ‘코로나19 시대, 재난 거버넌스의 형성과 전망: 국제비교연구를 위하여’ 학술대회에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대비한 중장기 전략 및 국제개발협력에 대해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내 동북아시아센터와 아시아지역정보센터,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주관으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보건, 행정, 정치, 경제, 사회 등 주요 전문가들이 모여 ‘코로나19’의 사회적 충격을 이슈별로 진단하고,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대비해 서울대 내의 코로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국제비교연구를 모색하고자 마련된 자리다. 이 날 이미경 코이카 이사장은 현재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로 지칭되는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관련 "앞으로는 코로나19 이전시대의 환경파괴, 불평등, 인권침해, 질병감염 등과 같은 문제들을 해소하는 노력들이 '뉴노멀' 시대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UN이 제정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의 △ 깨끗한 물과 위생 △빈곤퇴치 △불평등 감소 등 코로나19로 전면에 드러난 과제들 해결과 연계되는 것으로, 이는 코이카가 시행하고 계획하고 있는 과제들이기도 하다. 특히 “1차, 2차 대전 이후에 국제연맹과 UN이 만들어졌고 오일쇼크(1973년), 금융위기(2008년) 이후에 G7, G20이 만들어 졌듯 코로나19 이후에도 뉴노멀 체제가 만들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재편될 세계에서 차지할 한국의 위상은 한국이 현재 어떤 대응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이미경 이사장은 강조했다. '포스트 코로나19' 준비와 관련하여서는 “경제력이 약한 나라에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취약해져 있을 △빈곤 △생계 △교육 △보건 문제 지원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고, 코로나19가 광범위하고 글로벌 차원에서 불거진 문제인 만큼 해법도 광범위하고 글로벌 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날 학술대회에서는 현재 전세계가 한국정부에 협력을 요청하고, 국제기구(UN,OECD), 민간재단과의 국제적 공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코이카가 포스트 코로나19 준비와 관련해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경험을 살려 △코로나 대응의 긴급 인도주의 지원 실행 △국내외 사회적 경제 연대노력 △인력교류 중심의 ODA 프로그램(연수, 봉사단) 변화모델에 대한 즉각적 액션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졌다. 이에 대해 송진호 사회적가치경영본부 이사는 코이카는 “코로나 중장기 대응 전략과 프로그램 구상 방안’으로 △보건의료지원 △개도국 감염병 대응 역량 강화 △감염병 대응 거버넌스 강화(한국경험 활용) △사회경제적 취약게층 보호를 위한 지원식량,주거 및 사회안전망 지원 △개도국 시민사회 애드보커시 역량강화 지원 △국제적 대응 거버넌스 강화 에 중장기 대응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실천을 위해 오후 1시부터 6시간 동안 유튜브로 실시간 중계됐다. 발표 자료를 영문 번역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경험과 대응방안, 나아갈 방향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셰프, 푸드스타일리스트, 먹방크리에이터에 이르기까지, ‘요리’ ‘음식’ ‘맛집’ ‘먹는 것’과 관련된 직업이 ‘핫’해진 지 한참이다. 먹는 것 싫어하는 사람, 관심 없는 사람 거의 없고, 특히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을 보는 것, 음식을 만들고 요리하는 것을 보는 것, 음식을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는 것까지 싹 다 ‘관심사’의 일부가 됐다. 그런 면에서 ‘쿠킹앤(Cooking&)’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쿠킹 그리고...’ ‘쿠킹 플러스알파’? 아, ‘쿠킹 그 이상’이 적절하겠다. 이 브랜드를 이끄는 사람, 한희원 셰프를 만났다. 그는 요즘 윤제문 감독, 정성화-김고은 주연의 뮤지컬영화 ‘영웅’의 푸드 디렉터로 음식 장면(연회-식사 신 등) 촬영 기획-진행에 한창이다. 미술학도서 셰프로...佛 코르동블루서 양식 전공 따뜻하고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한희원 셰프는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충분히 예상되는 수순이었다 해도 순수회화 전공자가 졸업 후 경제활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한 자기그릇 제조회사에서 테이블 데코레이션을 하게 됐다. “그릇을 예쁘게 세팅하고 디스플레이 하는 일이 꽤 재미있었어요. 근데 그릇만 가지고 하다보니까 뭔가 좀 빈 껍데기 같은 느낌,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안에 채우는 걸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를 배워야 하는데 ‘이왕 할 거면 제대로 정통으로 하자’ 싶어서 파리 코르동블루에서 양식을 공부하게 됐어요.” 원래 요리에 관심이 없거나 아예 낯설다면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 도전이었을 것이다. 한 대표네는 종가집이어서 매달 제사가 있었다. 손님이 왔다하면 20~30명씩 오고 엄마, 외할머니 모두 요리는 물론, 손님상에 올라가는 장식까지 손수 만드셨다. 늘 잔칫집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시장 따라다니는 거 좋아하던 한 대표도 어느새 요리를 꽤 잘 하고 있었다고. 2년 반 파리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예상대로(!) 뭔가 준비되고 예정된 길은 없었고 경기도 구리에 파스타집을 열어 2년 간 운영했다. ‘성공적!’까지는 아니었어도 첫 창업에서 많은 걸 배웠다. 이후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아동요리지도사과정’을 만들어 커리큘럼을 짜고 강사를 양성해 배출하기도 했다. 한 2년 원래 전공을 살려 갤러리 큐레이터로 일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 길은 ‘요리 콘텐츠’였다. 주방기구제조사에서 요리 동영상도 만들고 회사 스튜디오에서 직장인 대상 강좌도 진행했다. 그러다 PR대행사를 운영하는 정동수 대표와 의기투합해 현재의 ‘쿠킹앤’ 브랜드를 만들었다. ‘요리로 소통하다’...‘쿠킹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새 차원 PR전문가와 셰프의 만남? 언뜻 매칭이 잘 안 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정 대표와 한 셰프의 공통분모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이다. 정동수 대표는 ‘PR(Public Relation)’ 뜻 그대로 소통전문가였고, 한희원 셰프는 요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2013년 ‘쿠킹앤’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쿠킹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개설, 쿠킹을 통해 팀워크를 다지는 조직활성화 차원의 소통 프로그램을 주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새로운 직원교육 프로그램에 목말라 있는 많은 기업들이 이 과정에 호응을 보냈다. 지루하고 뻔하지 않은 신선한 교육을 찾던 ‘열린’ 기업들에게 딱 포착됐던 것. 준비할 게 많은 쿠킹 프로그램이었음에도 한 번에 5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한 적도 있을 정도다. “기업 대상 쿠핑 프로그램과 함께, 평소 요리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요리의 즐거움을 알려주겠다는 취지로 어린이, 남성, 직장인들 대상으로 강좌도 열었어요. 다른 강습생들에 비해 남성들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에요. 요리에 관심이 있어도 강좌 등록 자체부터 어려워하죠. 그래서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는 메카니즘도, 교육 스타일도 좀 달라요.” 남성들을 위한 맞춤형 요리교실을 만들자 신청자들은 소위 사회적 지위도 높고 연령대도 높은 분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도 관심은 있으나 상대적으로 돈과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 “나이 드시고 어느 정도 위치에 계신 분들이 자신에게 맞는 취미, 힐링이 필요한 프로그램을 찾고 계셨어요. 요리를 통해 힐링을 얻고,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뭔가 가족들에게 어필할 ‘필살기’ 같은 걸 필요로 하셨죠. 요리를 하면 가정 분위기가 확 좋아지고 소통도 원활해지면서 가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찾아갔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다양한 쿠킹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또 외식/창업 메뉴 개발이나 컨설팅 등을 꾸준히 하고 있는 중에 만난 일이 영화, 드라마 속 음식(식사/연회 등) 장면의 메뉴, 차림, 디스플레이 등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영화·드라마 ‘푸드 디렉팅’으로 개척한 신세계 처음 시작은 기관 홍보영상물과 웹드라마였다. 여기 들어갈 음식 장면, 메뉴를 만들어주다가 영화 ‘더 킹’을 맡게 됐다. 음식이 들어가는 장면의 기획과 진행. 처음 맡게 돼 하는 일이지만, 단순히 음식, 메뉴, 먹는 게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감독의 의도는, 영화 속 각각의 캐릭터가 뭘 먹느냐가 곧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줬으면 하는 것이었어요.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예컨대 야망에 넘치는 주인공 정우성 배우의 경우 야생적으로 보일 수 있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먹는데, 안심보다는 등심, 이것보다는 티본스테이크가 더 와일드하게 보일 것 같았어요. 그릇, 주변 분위기, 나이프 하나도 예쁜 모양이 아닌 것으로 준비했고요.” 시나리오에 ‘상위 1퍼센트가 더티하게 노는 파티, 화려하고 퇴폐적인 파티’ 뭐 이런 식으로 한 줄 써 있다면 이걸 보는 사람들이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도록 시각화하기 위한 식기, 요리메뉴, 자리배치 등 전체적인 푸드 디렉팅 작업이다.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고기를 구워도 욕망, 야성이 잘 드러날 수 있게, 고기가 잘 다듬어져 있는 게 아니라 뼈가 붙은 채로 통째로 굽는 비주얼이 맞겠다 싶어 정육점에 특별 주문을 해서 만든다든지, 얼음 모양 하나도 장면과 어울리게, 그렇게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잡아가는 과정이에요. 보는 분들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하죠.” 이런 음식 장면들 모두 이전에는 소품 담당이 다 알아서 준비했다면, 이제는 전문 분야로 인식돼 점점 푸드 디렉터들이 참여하는 추세다. 그리고 국내에 많지 않은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바로 한희원 대표다. 영화 ‘더 킹’에 이어 ‘상류사회’, 그리고 드라마 ‘기름진 멜로’ 푸드 디렉팅도 담당했다. 아예 드라마 배경이 중식당, 요리가 전면에 나서는 드라마였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거의 ‘생방’ 수준이라 4개월간 매일 방송국에 출근 했어요. 죽을 뻔 했죠. 하하. 요리로 생방송을 하다니!(웃음) 이런 드라마 나오기 쉽지 않을 거예요. 제작비도 많이 들거든요.” ‘기름진 멜로’의 경우, 실제 요리를 담당하는 중식 셰프 5명과 함께 했다. 한 대표는 전체적인 기획과 함께 어떻게 하면 요리가 화면에 잘 보여질까를 고민했다. 드라마인 만큼 상상력이 가미된 메뉴도 만들어야 하는데 정통 코스를 밟은 전문 셰프들이 정석이 아닌 요리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대본을 구현하기 위해 한 대표의 자문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실제 메뉴에 가미해 구현, 새로운 조합으로 세상에 없는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도 한희원 대표의 업무영역 중 하나다. 요리 디테일하게 잘 녹여낸 영화 만들고 싶어 최근 작업한 작품은 영화 ‘기방도령’과 ‘천문’이다. 두 편 다 사극으로 고증에 특히 어려움이 많았단다. 구체적 시대가 정해져있지 않던 ‘기방도령’보다 ‘조선 세종시대’로 설정된 ‘천문’은 그 시대에 맞춰야 하는데다, 의외로 조선 전기 자료가 많이 없어 특히 고증 작업이 힘들었다. 조미료도 제대로 없던 시절인데 또 비주얼은 예뻐야 하니까 역시나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지금은 뮤지컬영화 ‘영웅’에 집중하고 있는데, 언젠가 요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좀 더 디테일하게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요. 우리나라는 역시 스토리가 중요하니까, 스토리에 요리를 잘 녹여낸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또 하나는, 요즘 굉장히 중요한 화두인 ‘도시재생’ 관련해서 먹거리가 도시의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 하나거든요. 좋은 식당 하나만 들어와도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 동네가 뜨기도 하잖아요. 그런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요리, 외식사업 이런 것들을 기획해보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득, 셰프의 집밥, 가정요리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솔직히 집에서 요리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특히 한식은 기본적으로 밑반찬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주로 스테이크, 파스타 등 일품요리를 많이 하게 돼요. 아, 저도 냉장고 파먹기 잘해요(웃음). 응기응변에 능해져서 즉석에서 하는 요리들이요. 맘먹고 하면 프랑스식 소고기찜이라 할 수 있는 ‘베프 부르기뇽’을 맛있게 잘한답니다.”
첫눈에도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해 보이는 사람이다. ‘동안 외모’ ‘나이를 거스른’ 같은 표현이 매우 구태의연하지만 여전히 찢어진 청바지가 어울리는, 실제 즐겨 입는, 형식이나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을 것 같은 리더다. 근데 신기한 건 그의 커리어의 대부분은 ‘공무원’과 호흡을 맞춰야하는 지자체나 중앙부처 산하 공공기관이었다. 고선주 서울시50플러스재단 캠퍼스사업본부장. 서울시의 3개 캠퍼스(서부/중부/남부캠퍼스) 관장을 겸하며 이들을 총괄하는 자리다. 캠퍼스 ‘관장’ 직함이 있지만 재단에선 대표이사를 보좌하는 핵심 참모(본부장)다. 이전까지 4년간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건강가정진흥원장(2년은 중앙건강가정지원센터장)으로 재직했던 이력을 고려하면 이례적 행보일 수도 있다. “지금은 기관의 대표가 아니라 직원인 셈이죠. 사실 이전에 건강가정진흥원장 임기를 마쳤을 때 주변의 관심은 그거였죠, 다음엔 어느 자리, 어느 조직의 장으로 가느냐. 기관장을 했다고 꼭 다음에도 또 기관장을 해야 하고 그런 건 없어요. 그때그때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죠.” 인상만큼이나 마인드도 산뜻해 보인다. “캠퍼스 주요 타깃은 50~64세...남성들 참여 많아” 서울시50플러스재단. ‘50플러스’라는 용어가 언제부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서울 권역별로 서부/중부/남부캠퍼스가 있다. 앞으로 북부/동부/동남캠퍼스도 설립될 예정이다. 또 각 구에도 속속 50플러스센터가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 50+세대의 성공적 인생재설계 지원을 위해 설립된 서울시 출연기관이 바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다. 여기서 고선주 본부장은 서부/중부/남부캠퍼스 사업을 총괄하는 각 캠퍼스의 관장을 맡고 있다. “3군데 캠퍼스 사업을 총괄하다 보니까 한군데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돌아다녀요. 솔직히 힘들어요(웃음). 50플러스재단과 캠퍼스가 출범한지 몇 년 안 되다 보니까 아직도 많은 분들이 낯설어 하시는데요. 주요 서비스 대상 연령은 50세에서 64세예요. 65세 이상 어르신 분들은 별도 법령에 의해 복지나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럼 50~64세 범위에 해당되지 않는 그 전후 나이의 분들은 이용할 수 없냐고 많이들 문의하시는데, 아니에요.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하.” 50플러스캠퍼스 이용자 분포를 보면 주요 타깃이라 할 수 있는 50~64세가 80%, 나머지 20%는 그 전후의 나이인 40대 후반, 60대 중반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남성들의 비중이 절반에 육박한다는 것. 남녀 비중이 대략 45:55라고 하니 평생교육원, 종합복지관 등 다른 공공 복지시설에 비해 남성들의 참여가 꽤나 높은 편이다. “비슷한 성격의 다른 공공 복지시설처럼 압도적 비율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여성분들이 좀 더 많긴 해요. 물론 과정에 따라 다르긴 하죠. 특강은 여성이 많고 사회적 경제라든지 전문인력 결합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남성들의 참여가 훨씬 많아요. 네트워크를 만들 땐 역시 남녀가 함께 하는 게 훨씬 잘 되더라고요.” “50세 이후 삶에 대한 모델 거의 없어” 앙코르커리어’ 위해 필요한 것은? 50플러스캠퍼스 주 타깃 연령이 50~64세인 건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100세 시대’에 노인이나 어르신으로 불리기 애매하고 어정쩡한 나이이기 때문. “저희 윗세대는 60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쭉 노인의 삶을 살았죠. 50 이후의 삶에 대한 모델이 없었어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5,60대가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이전과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됐죠. 50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건가에 대한 생각들이 일, 그리고 관계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중요해졌어요. 과거세대보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실제 능력도 있는 5,60대가 많아졌죠. 어쩌면 이분들은 부모세대는 물론, 자녀세대보다 더 교육-경제 수준이 높을 수도 있어요. 이런 분들의 능력이 사회에 환원되지 않는 건 사회적으로도 손실이죠.” 50플러스캠퍼스는 ‘일의 전환’ ‘앙코르 커리어’라는 면에서는 개인적 보람이 있고 사회적 의미가 있으면서 (은퇴 전 수준은 아니더라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 연계를 지원한다. “이 경우도 청년층 일자리나 복지 차원 일자리와 충돌하면 안 되고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는 식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건 아니어서요. 센터를 찾으실 때 우선 자신에 대한 진단이이 먼저 돼야 합니다. 과연 고용하려는 쪽에서 볼 때도 내가 매력적 인력인지. 잠재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또 일정부분 눈높이를 낮추거나 비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을 가진 인력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건 고무적이다. 특히 요즘 관심이 높은 ‘사회적 경제’ 부문이나 정부의 정책적 지원 확대 등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많다. 물론, 극복하고 뛰어넘어야할 개인적-사회적 장애요인들은 여전하다. “실제 은퇴 연령이 평균 52,53세쯤 되는데 이 분들은 대부분 관리직으로 은퇴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실무에서는 멀어지고 은퇴 직전엔 머리와 말로 일을 하신 경우가 많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직무능력이 떨어지거나 다른 세대와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에 익숙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50+세대, ‘관계의 전환’은 어떻게 이룰까? 50 이후의 삶에서 ‘앙코르 커리어-일의 전환’과 함께 정말 중요한 것이 ‘관계의 전환’이다. “여성들은 좀 다른데, 남성들은 오랜 기간 조직에서의 수직적 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죠. 수평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져야 ‘관계의 전환’도 이룰 수 있는 것 같아요. 50플러스캠퍼스에서는 커뮤니티 활동을 많이 유도하면서 함께 하는 삶, 나누는 즐거움을 공감하게 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특히 남성들은 살아오면서 봉사라든지 커뮤니티 활동 등에 취약한 경우가 많아 과거 경력과 연관된 오프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일의 전환’ ‘관계의 전환’을 통해 50플러스캠퍼스가 지향하는 것은 ‘유쾌한 나이 듦’이라는 콘셉트다. “50 이후의 삶이 왜 즐겁지 않을까요? 이건 50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아서이기도 하고요. 이제까지의 모든 삶의 기준이 직업, 일에서의 성공이나 아이들 교육이고 결국 그 성취가 그 사람을 규정하게 되니까 직업, 일 즉 ‘명함’이 없는 삶을 못 견디게 되는 거죠. 명함이 없어지는 게 마치 자기 존재가 부정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심지어 은퇴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가족들도 반가워하지 않고요. 은퇴는 충격적 사건이 아닌 적응해가야 할 과정이고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온 가족이 모두 같이 변화해야 하는 과정이죠.” 이 ‘관계의 전환’에서 고선주 본부장이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나와의 관계’다. “지금 5,60대 분들도 자기 자신을 별로 케어 하지 않은 분들이 많아요. 캠퍼스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쪽으로 서서히 생각의 변화를 하고 계시죠. 결국 일과 관계가 핵심이고, 가족도 ‘관계’거든요. 결혼-출산 등으로 연결된, 서로 애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경제-돌봄 공동체요. 저도 마찬가지인데, 50 이후의 삶은, 일과 관계의 균형 찾아가는 것, 그 중에서도 우선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죠. 그 다음 가족,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더 나아가 다음세대, 이웃 등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는 거고요. 일과 관계의 전환이 잘 이뤄지면 성공적 삶인 것 같아요.” 함께 일하는 직원들 키우기-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한 사람 여성-가족분야 공공섹터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고선주 본부장, 이제 그 자신이 딱 50플러스캠퍼스의 주요 서비스 대상 연령대에 와 있다. 일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지금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다른 이들과 똑같이 깊이 생각하고 살펴봐야 할 시점에 서 있는 셈이다. “제가 갖고 있는 목표는 여러 가지예요. 아, 자리나 지위에 대한 목표는 아니고요. 우선 저랑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잘 키우는 게 그 중 하나고요. 제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는 자유도 제겐 중요해요. 정치를 안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죠. 내 삶이 남에게 통제받는 상황을 원치 않거든요. 내 삶, 내 시간은 온전히 내 통제에 두는 게 좋아요. 일이요? 정년퇴직할 때까지 해야죠.(웃음) 그 이후요? 능력이 된다면, 꼭 무슨 조직의 대표나 장이 아니라 강의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유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온화한 인상, 조곤조곤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 조영미 서울시여성능력개발원장을 보면 한눈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이런 거구나’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모습 속엔 엄청난 열정과 욕심이 숨어있다. ‘독한 워커홀릭에 목표-성과주의자’라고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런 ‘일에의 몰입’은 급작스러운 ‘번아웃(Burn-out)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전 직장에서 11년간 스스로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일에 집중하고 몰입한 결과, 2년 전 퇴직했을 때 그 어떤 것도 할 생각이 안 들었어요. 무작정 가장 하고 싶은 걸 하러 갔는데 그게 ‘피아노 레슨’이었어요. 운동보다 더 하고 싶었고 절실했어요. 무려 45년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안 될 줄 알았는데 배우니까 또 되더라고요. 1년간 피아노만 쳤어요(웃음). 그렇게 1년 쉬고 나니 다시 일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이전 직장’은 서울시 출연기관인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다. 이곳에서 조영미 원장은, 여성정책연구부터 사업, 국제협력 업무까지 두루 경험했다. 퇴직 전엔 ‘정책개발실장’을 맡았는데 ‘재단에 있는 동안 정작 연구는 많이 못한 것 같다’고. 그도 그럴 것이 ‘여성가족재단’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면서도 전문 연구기관이라기 보다는 실제 정책과 사업에 필요한 실용적 연구와 사업, 컨설팅을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1년 푹 쉬고 나니 다시 일할 에너지가 생겼어요. 대학 강의와 성주류화-성별영향평가 컨설팅, 공무원 대상 강의, 공동연구 등을 하며 지냈어요. 재단에서는 직접 연구와 컨설팅을 할 기회가 적었는데 오히려 프리랜서를 하면서 서울시 정책이 어떻게 동 단위까지 적용되는지를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풀뿌리 현장에서 어떻게 정책이 수용되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출연기관에서 서울시와 일했던 공공의 경험에 젠더 감수성이 융합되니까 훨씬 더 현장감 있는 강의를 하게 되더라고요.” ‘성과주의 워커홀릭’, 11년 만에 번아웃...‘풀뿌리’ 경험 후 다시 새 도전 11년간 몸담은 서울시여성가족재단 퇴직 후 1년은 피아노만 치고, 또 1년은 강의-교육-연구로 워밍업(?)을 한 그는 올해 4월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여성능력개발원장에 취임했다. 서울시여성능력개발원(이하 여능원)은 서울시 각 권역에 있는 여성발전센터(동/서/남/북/중부센터)와 각 구에 설치된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총괄, 조정, 평가, 지원하는 헤드쿼터로서, 일자리 기관들의 네트워크 및 여성의 직업-경제역량 강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요즘 화두인 일자리, 그 중에서도 여러 면에서 여전히 불리한 여건과 상황에 처해있는 여성들의 직업교육과 취업지원사업을 펼치는 인력개발기관의 중심축인 셈이다. 2002년 현재의 동부여성발전센터에서 개관한 ‘여능원’은 2014년 대방동 여성가족재단 서울여성플라자로 자리를 옮긴 뒤 불과 몇 달 전 지금의 널찍한 새 보금자리(마포구 도화동 포스트타워 7층)로 이사했다. “저는 아무래도 실무형 리더십인가 봐요, 하나하나 펜으로 고치는. 직원들이 피곤한 스타일이죠(웃음). 근데 지금 여성능력개발원은 실무파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여능원 조직이 설립 이후 변화와 부침이 많았는데 시 산하기관으로서 점점 더 엄격한 행정 기준에 맞춰 일을 해야 해요.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고 많은 부분이 시민에게 공개되다 보니 행정이 더욱 투명해지고 예산을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써야 하죠. 그런 요구들이 더 커지다보니까, 그동안 약간 NGO나 단체처럼 일하던 분위기를, 공무원 행정조직에 맞게 맞춰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어요. 가각의 리더마다 자기가 해야 하는 역할, 맞는 역할이 있는데 저는 2년간 그 틀을 잡아나가야 할 것 같아요.” 실제 여능원은 직원들의 이직이 많아 6개월 내 입사한 직원이 70%나 될 정도이고, 공공조직에서 일해 본 직원이 거의 없어 여성가족재단에서 오랜 기간 서울시와 호흡을 맞춰 일한 조영미 원장의 경험과 리더십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한 우물 파기보다 안 해본 거 도전하는데 재미” 조영미 원장은 ‘의외성’이 많은 사람이다. 어쩌면 자신은 자연스러운데 남들만 그렇게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부드러운 외모에 감춰진(?) ‘독한 워커홀릭에 목표-성과지향주의’라는 표현도 했지만, 여기에 또 하나, 그는 상당히 진보-급진적 성향을 지닌 여성학 연구자이기도 하다. ‘대졸여성 공채’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던 1980년대 초반, 조 원장은 모 건설대기업 대졸여성 공채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졸 여성 20명을 뽑았는데 그야말로 ‘사무실의 꽃’이었다고. 회사에서도 이들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여직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심한 ‘가부장적’ 조직이었다. 여직원이 어떤 일을 해내면 그 일이 ‘쉬운’ 일이 됐고, 남직원이 못해내면 ‘어려운 일’이, 여직원이 못하면 ‘무능력’으로 치부됐다. 딱 1년 2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동기 20명 중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결혼생활도 평탄했지만 늘 답답함과 갈증이 있었다. “우연히 앨리슨 재거(페미니스트 철학자)의 책(여성주의 정치학과 인간본성(Feminist Politics and Human Nature), 이후 ‘여성해방론과 인간본성’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로 출간)을 읽게 됐어요. 국내에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읽었는데, ‘아, 이거구나, 내가 느꼈던 부당함이 이렇게 언어로 표현되고 설명이 되는 구나. 이 공부를 해야 겠다’ 싶었어요. 처음으로 내가 해보고 싶은 것, 공부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그게 ‘여성학’이었어요.” 그렇게 뒤늦게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재미있게 공부하고 박사학위도 땄다. 그리고 다시 발을 디딘 조직이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다. 그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거 좋아하는데 실제 재단에서는 직접 연구는 잘 못하고 연구 관리를 했다”며 웃는다. “전 한 우물 파기보다 새로운 것, 안 해본 것에 도전하는 재미를 가진 사람인가 봐요. 재단에 들어갔는데 여러 일들을 하다보니까 스스로 ‘정책연구 안 해도 돼, 사업해도 괜찮아, 관리를 해도 재밌어’라고 생각했어요. 완전 에너지가 소진되고 ‘지금쯤은 다시 출퇴근하라 해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싶을 때 여능원장 채용공고를 봤는데 솔직히 망설이긴 했어요. 인력개발분야는 여성정책과는 또 좀 달라서요. 근데, 안 해본 거에 도전하는 재미, 무모함 같은 제 특성으로 ‘가서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하게 됐어요. 하하.” 현장 밀착형 연구-조사-분석-솔루션 제공...주요 틈새 메운다 서울, 더 나아가 전국 곳곳에 자리한 여성인력개발기관은 1970년대 후반 ‘부녀복지관’으로 시작해 여성들의 직업교육과 취-창업지원 등에 많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시민들의 요구도 더욱 세분화-다변화 되면서 많은 인력개발기관들이 변화-쇄신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그간 인력개발기관들이 단순직무 중심 교육을 많이 해왔는데 산업이 고도화되고 또 여성들의 학력수준도 높아지고 특히 서울의 경우 인적자원들이 더욱 다양한 상황에서, 또, ‘고용 없는 성장시대’와 유례없는 취업난 속에서 기존 틀의 교육과 사업으로는 성과를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여능원의 경우 인력개발기관의 총괄 기능을 강화하고 다양한 여성 인적자원의 특성에 맞는 전문화된 맞춤형 교육 제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예산 투입이 필요한데 이건 또 쉬운 일은 아니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능원의 총 정원은 조 원장까지 11명이다. 정원 외 계약직, 단기인력까지 합치면 35명이지만 상주 인원으로 따지면 여전히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여능원의 대표 지속사업이자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일자리부르릉 버스’ 2대가 매일 운행되며, 특히 여성들이 밀집된 지역에 출동해 직업상담 및 연계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서울에서 20여개가 운영되고 있는 ‘새일센터’를 총괄하는 ‘광역새일센터’를 운영, 경력단절 여성 대상 직업상담-취업연계 사업을 지휘한다. 여기에 인력개발기관 종사자 및 강사 역량 강화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이와 함께 조영미 원장의 장점인 ‘정책연구’ 기능도 올해는 더욱 강화한다. “연구인력이 없는데 연구과제가 5개예요. 큰 포럼이나 박람회, 총괄 기능을 수행하려면 연구가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하죠. 제가 원장으로 오게 된 배경도 이게 아닌가 싶어요.” 연구 프로포절부터 직원들과 같이 쓴다. 여성일자리정책 연구의 경우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큰 방향을 잡지만, 직업훈련-취업연계에 있어 현장수요 분석, 구인구직 수요 분석, 앞으로의 직업 전망과 이에 따른 특화 교육 개발 등 현장 밀착형 연구, 조사, 분석은 여능원의 몫으로 앞으로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예컨대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여성들이 다니기 좋은, 제도적으로 잘 갖춰진 기업을 직접 방문해 여성들의 장기근속을 가능케 하는 조건, 제도 등 요인을 파악하고 여성근로자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30개 기업을 샘플로 해서 아주 깊이 있는 분석을 하는 식이죠. 거시 통계 말고 현장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데이터들을 모아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가는 조사, 분석, 솔루션 등인데 이걸 꼭 ‘연구’라고 명명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현장 중심의 틈새 연구가 매우 필요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조영미 원장은 중요한 화두를 꺼냈다. “워커홀릭으로 달려오기만 하다가 너무 지쳐 아무 준비 없이 퇴사를 하고 쉬고 나니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많은 경우 이제 90세, 100세 수명이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어요. 근데 예전처럼 60세에 은퇴하고 많은 기간 취미나 봉사생활만 한다? 이게 경제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100세 플랜에 맞춰 일, 경제적 수입이라는 게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은퇴 후 취미, 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고 어쨌든 많은 기간 일이 더 필요하죠. 물론, 기존에 했던 일의 패턴과는 달라져야겠죠. 축적된 전문성과 관련 있는 일들을 주 3일 혹은 매일 시간제로 하는 식으로 너무 과하지 않는, 그러나 취미와 봉사와는 또 다른 성격의 일이 필요하고, 관련 정책도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최인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조안 리),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한비야)... 1990년대 초중반, 여대생들 사이에서 필독서 혹은 롤 모델로 꼽혔던 저자들의 베스트셀러다. 그 당시 표현대로 한다면 ‘커리어우먼’의 표상 혹은 ‘프로페셔널’의 전형으로 꼽힐 만한 이들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졸’ 여성들이 ‘공채’로 대기업을 입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나마 ‘채용이나 승진에서 남녀차별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외국계 기업에서 대졸 여성들을 일부 채용, 당시만 해도 국내기업에 비해 처우가 좋고 ‘주5일제’ ‘연차제도’ 등을 도입한 외국계 기업은 여대생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호텔과 항공사 등이 업의 특성상 여성들을 대거 채용했지만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용이한 직장은 또 아니었다. ‘대기업공채’가 막혀있는데다 ‘뭔가 창의적이며 일하는 보람이 남다를 것 같은’, 요즘 말로 ‘있어빌리티’ 충만해 보이는 직장들(예컨대 광고대행사나 언론사)이 전통적으로 공채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곳들은 ‘바늘구멍’이다. 다시 앞서 언급한 베스트셀러들로 돌아가 보자. 이 저자들을 묶는 공통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글로벌, PR, 광고, 프론티어 등쯤 될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여기 이 키워드를 모두 관통하며 위 저자들보다 선배로서 ‘글로벌PR’이라는 외길을 개척해온 ‘홍보업계 맏언니’가 있다. 낸시 최(Nancy Choi), 그의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길게 돌아왔다. 첫 줄에 소개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1990년대 베스트셀러이자, 많은 여대생들 손에 들려 있던 ‘나는 세상의 창을 보았다’ ‘나를 마케팅하고 세계를 PR하라’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도 중심, 시청앞 광장을 굽어보는 프레지던트호텔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에 둥지를 튼 지 어느새 사반세기가 흘렀다. “꿈? 뭘 해야겠다 생각해본 적 없어...그래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본 듯” 우리는 흔히 ‘꿈이 있어야 한다,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남다른 성취를 이뤘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역경 속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갔다거나 자신만의 목표로 인해 그 고난을 다 헤치며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게 ‘흔한 사고의 정석’이기도 하다. 근데 의외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꿈이 없었다’거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낸시 최도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 후에 취직은 해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특별히 꿈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뭘 해야겠다 생각해본 적 별로 없고요. 근데 해보고 싶은 건 거의 다 해본 것 같아요. 하하.” 이 무슨 이율배반적인 말인가. 꿈도 없고 뭘 해야겠다 생각도 안했는데 해보고 싶은 건 다 해 봤다니. 근데 최 대표에게 들으니 묘하게 설득이 된다. 공부 잘하고 영어에 관심이 있어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그가 대학을 다닌 시절에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코스가 그리 일반적이진 않았다. ‘대졸’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정말 흔치 않았다. 당시 ‘세계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Pan Am, 팬아메리칸항공)과의 인연은 가히 운명적이었다. 찰스 램 수필 과제를 위해 영국문화원에 갔다가 그곳 직원에게 한국지사 직원채용 공고가 담긴 신문을 받았다. 지원을 했는데 한두 명 채용에 130명이 몰렸다. 같은 과에서도 30명이 지원할 정도로 인기였다. 최종 합격자 두 명에 최 대표의 이름이 있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해외여행이 어려울 시기에 ‘글로벌’하게 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았다. 비서로 출발해 마케팅과 세일즈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10년 넘게 팬암항공에서 일한 후 KLM, 노스웨스트항공 등을 거쳐 1990년 글로벌PR전문회사인 지금의 ‘씨제이스월드(C.J.’s World)’를 세웠다. 내년이면 창립 30주년이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당시 하와이 관광청 국장님이 ‘낸시는 PR에 능력이 있는 것 같다’며 창업을 권유했어요. 회사에서 한창 커리어를 쌓을 때여서 사업은 생각도 안했는데 이 분이 ‘PR을 해 달라’며 1년을 끈질기게 요청하셨죠.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창업을 한 게 지금까지 왔어요. 회사이름도 그 분이 지어주셨죠.” ‘씨제이스월드’ 내년이면 창립 30주년...‘글로벌 관광 PR’ 외길 낸시 최 대표는 1990년 창업 이래 ‘글로벌 관광 PR(Destination PR & Marketing)’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그동안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등 10여개 관광청 한국 대표로서 국내에 낯선 지역들의 매력을 발굴 소개하며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인기 관광지’로 만들어왔다. 현재도 노르웨이-독일-오스트리아 잘즈부르크 관광청 대표로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 “글로벌 관광 홍보는 새로운 지역을 발굴해 한국에 알린다는 거, 그리고 그 나라에 한국을 알린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제가 외국항공사에서 오래 일하면서 해외여행이 어려울 때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닐 수 있었던 것, 워낙 여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도 저한테 잘 맞았고요. 어떤 공식에 따라서 하는 게 아니고 그 나라, 지역을 알리기 위해 어떤 식의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론칭해 사람들이 그 곳에 흥미를 갖게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성과가 나타났을 때 큰 보람을 느껴요.” 지금 PR을 맡고 있는 곳은 노르웨이, 독일, 오스트리아 잘즈부르크주 관광청 등이다. 특히 노르웨이의 경우, 관광지로서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그나마 ‘스칸디나비아 3국’ ‘피오르 3국’ 중 하나로만 인식돼 있는 미지의 나라인 셈이다. 자연, 특히 ‘피오르’라는 걸 가지고 포지셔닝을 했고 그 결과 전세비행기까지 띄울 정도로 한국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연간 12만명 정도가 노르웨이를 다녀왔을 정도. “이제 정규 항공편이 만들어져야죠”하는 그의 말에서 ‘아직 배가 고프다’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어록이 얼핏 스쳤다. 우리나라 글로벌PR의 역사이기도 한 씨제이스월드는 내년이면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2020년에 30주년. 딱 딱 떨어지는 숫자만큼 의미도 남다르지만 최 대표는 의외로 담담하다. “의식 못하고 있었는데 한 지인이 알려주시더라고요. 뭔가 해야 할까요?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하.” 공백 없이 달려온 커리어 “쉬고 싶다는 생각 없다...재밌고 항상 변화하니까” 커리어를 쌓아온 지 어느새 40년이 훌쩍 넘었다. 특히 공백이나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이라 더욱 대단해 보인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공백이나 휴식이 없었음에도 지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일이 재밌어서 그런가 봐요. 항상 변화해서 그런가? 물론, 어려운 때도 있었죠. IMF 때 클라이언트들이 떠났을 때라든가. 근데 일을 하다보면 약간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에 맞춰 전략을 만드는 거죠.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사업은 결국 사람이고 네트워크라는 말이 있다. 낸시 최 대표의 경우도 처음 창업할 때부터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맥 관리, 사람 관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특별히 관리는 안 한다”며 “평소에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 준다. 그렇다고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것들이 쌓이면 저절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도 특별하다. “기본 역량이 돼 있다면,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좋아요. 또, 다른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보다는 신입사원을 주로 채용하고요. 이미 자기 스타일이 구축된 사람은 우리 회사 스타일이 잘 안 맞을 수도 있어서요.” 그러면서 “그 무엇보다 솔직한 사람이 좋다”고 덧붙인다. 이제까지 성공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사업을 이끌어온 비결에 대해서는 ‘특별한 게 없다’고 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더한다. “일할 때 중요한 건, 상대방(상사든 클라이언트든)이 뭔가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제시하거나 실행하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많이들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데, 상사가 묻기 전에, 시키기 전에 먼저 해놓으면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아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좋은 팁이 아닐 수 없다. ‘PR업계 맏언니’이자 ‘시청앞의 터주대감’이기도 한 낸시 최 대표. “밥값 없어도 아마 외상으로 한 달은 견딜 수 있을 걸요?”라며 싱긋 웃으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친근하지만 도도한 카리스마’가 흘렀다.
이상하게 1년 반이면 ‘몸이 근질근질’ 이직을 하게 되는, 아니 하고 싶어졌던 ‘프로이직러’가 어느새 8년 째 한 직장에 몸담고 있다. ‘최장기 근무’를 넘어 실질적 수장으로 조직을 이끌어가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함께 걷는 아이들(이하 ‘함걷아’) 유원선 사무국장 얘기다. 첫 직장은 처음이라 뭣 모르고 2년, 공부가 필요하다 싶어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들어간 두 번째 직장 1년 반, 세 번 째 직장도 1년 반, 그리고 1년 여 육아에만 전념하다 들어간 네 번 째 직장은 4년. 상대적으로 재직기간이 긴 이유는 본부가 아닌 프로젝트 기반 사업단, 즉 외곽조직에서 일했던 덕분이다. 이후 서울시 출연기관으로 여러모로 처우와 체계가 좋았던(혹은 그렇게 보였던) 기관에선 오히려 1년도 못 채웠다. 그리고 큰 깨달음, ‘아, 전 직장이 일-가정 양립이 꽤 잘 됐던 거구나’. 그 다음엔 ‘이젠 정말 푹 쉬어야겠다. 다시 일하더라도 조직엔 들어가지 말아야지’ 하며 휴식기를 가지려했으나 맘대로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회복지사 유원선을 찾았다. 실은, 일을 꽤 야무지게 잘 해냈던 덕분에(=능력자) 제안도 많이 들어왔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제안서나 매뉴얼 작업, 단기 프로젝트, 시간 강사 등으로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수입이 많았다. 신기하게 프리랜서 기간도 1년 반 정도였다. ‘1년 반 프로이직러’ 8년 째 한 곳에...“꿈의 직장 맞나 봐요” 그러다 역시 제안을 받고 ‘함께 걷는 아이들’ 팀장으로 다시 조직에 들어와 8년 째 일하고 있다. ‘정말 좋은 직장인가 보다’ 농담 반 우스갯소리를 건넸더니 유원선 국장은 환하게 웃는다. “실은 ‘함걷아’ 들어와 한 3년 쯤 후엔 어김없이 위기가 있었어요. 근데 팀장으로 있던 제가 사무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간 해왔던 사업들, 그리고 새로 세팅해야 하는 사업들이 있어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일하다보니 어느새 만 8년을 향해가고 있어요. 와~ 제 커리어에서 최장기 근무지예요. 저한텐 ‘꿈의 직장’ 맞나 봐요. 하하.” 서글서글 무난해 보이는 인상에 ‘1년 반, 프로이직러’였다는 게 살짝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현재는 한 기관의 장기근무자라,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직러’ 입장에서는 살짝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유원선 국장이 여러 직장에서 또 프리랜서로 끊임없이 일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일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년 반 짧은 기간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일이 끊이지 않았고 수입도 많았지만 ‘수입이 좀 적을지언정 전업 직장이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들어온 조직이 지금의 ‘함께 걷는 아이들’인 셈이다. “위기상황 청소년과 이들 돕는 활동가들을 지원해요” ‘함걷아’의 대표사업으로 많이 알려진 것이 ‘올키즈스트라’이다. 벌써 10년 째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고 또 눈에 보이는 피부에 와닿는 많은 성과를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올키즈스트라’는 문화예술로부터 소외된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악기와 음악교육을 제공하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공연도 하면서 이들에게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주는 사업이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예술전문기관, 어린이 복지기관 등에서 여러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사회복지기관에서 주요사업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체계적으로 하는 곳은 ‘함걷아’가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올키즈스트라(Allkidstra)’는 함걷아의 대표사업으로 인식되는데, 이 것 말고도 의미 있는 사업들이 적지 않다. “청소년사업도 있는데 많이 홍보하지 않아서 그런지 잘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요. 가출 청소년 등 위기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들은 일종의 ‘낙인’의 성격이 있을 수 있어서 적극적인 홍보를 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적절치 않을 수도 있어서요.” 청소년지원사업 중에는 ‘엑시트 버스(EXIT BUS)’가 유명하다. ‘엑시트 버스’는 매주 목, 금요일 저녁 8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수원역과 서울 신림역에 정차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청소년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고민도 들어주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는 공간이다. 식사와 간식, 물품을 제공하고 상담과 의료서비스, 가출 청소년이나 미혼모 등 도움이 절실한 청소년들에게 손을 내미는 ‘움직이는 센터’다. 위기상황 청소년들을 돕는 기관과 활동가들에게 이들이 지치지 않게 지원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실제 이들 기관이나 활동가들을 발굴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6개 단체를 선정해 지원하고 ‘자몽’이라는 네트워크 모임도 만들었다. 현장 활동가들 대상 워크숍은 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점점 더 뜨거운 반응 속에 진행되고 있다. “직접 악기 배우고 무대 서보니 아이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됐어요” 처음 함걷아에 입사할 때 유원선 국장은 음악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체 ‘음악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올키즈스트라’ 등의 사업을 순전히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진행했다. 팀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중 작곡을 공부한 직원이 한 명 있었다. “음악이라는 도구로 아이들이 좀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으려면 어떤 강사, 시스템을 조성해서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스트레스와 문제 해결 등의 변화를 겪을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그렇게 사업을 오랫동안 머리로 이해하고 평가하다가 저와 직원들이 직접 악기를 배우고 또 졸업한 아이들이랑 함께 연주회 무대에 서면서 정말 많은 걸 깨닫게 됐어요.” 유원선 국장과 직원들은 함께 관악기를 배웠다. 몇 년을 배우고 아이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 서면서 합주와 지휘자, 무대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고. 특히 연주회라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너무 큰 영향이었고 진짜 좋은 경험이라는 걸 알게 됐다. “머리로 하던 사업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악기를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만났죠. 하하.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에 연주회를 꼭 넣어야 한다는 것도요. 올키즈스트라, 진짜 좋은 사업이구나를 새삼 느꼈고요.” 올키즈스트라는 목관-금관악기로 이뤄진 ‘관악단’이다. 전국 9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주로 지역아동센터 콘소시엄으로 진행돼 취약계층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방에선 아예 연주를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서울에서는 일부 연주 경험이 있는 아이들도 함께 선발하고 있다. 전공 지원까지 해서 경연대회도 나가고 음악대학 관련 전공 입학생도 배출했다. “일-가정 양립 직장으로 세팅...내년 10주년, 안정적 후원구조 만드는 게 과제” 지난 2011년 입사했으니 유원선 사무국장이 함걷아와 인연을 맺은 지도 올해로 8년째다. 처음 입사했을 땐 달랑 3명이던 직원 숫자가 인턴을 포함해 어느새 12명으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사업에 비해 직원이 부족해 유원선 국장이 기획경영팀장의 역할을 하면서 연구, 대외협력활동, 이사회 운영 등 실무까지 맡고 있다. 유 국장이 함걷아에서 ‘최장기 근무’를 할 수 있었던 건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직 시스템을 최대한 ‘일-가정 양립’이 가능할 수 있도록 세팅한 영향도 크다. 비교적 이직이 낮고 장기근무자들이 늘면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직원들이 늘어나 한 달 총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채우면 되는 탄력근무, 폭염-혹한기 재택/원격근무 등 여성들이 가정을 돌보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었다. 이는, 짧게 집중해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유원선 국장의 업무 스타일과도 잘 맞는 시스템인 셈이다. “그동안 야근 없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건 특별히 모금-수익사업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사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가 가능했기 때문일 겁니다. 함걷아가 내년에 창립 10주년이 되는데, 소수의 고액 기부자들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불안정한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고민했을 때 보다 더 안정적이고 건강한 후원구조를 만드는 게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생이 ‘투잡러’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영어과외를 했고, 지금도 공연기획자이면서 ‘샤로수길’(낙성대역~서울대입구역 사이 핫로드) 수제맥주전문점인 '컵스'의 주인장이기도 하다. 공연기획사 뮤지컬파크 대표 김향란. 이국적 외모의 그는 1980년대 말 이미 여자대학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첨단’ 직장 중 하나였던 광고대행사의 AE, 삼성영상사업단 홍보마케팅/공연기획 담당 등 당대 문화 트렌드를 이끌어가던 최전방 일터에서 일했다. 전공도 영문학, ‘운명의 동반자’인 남편은 재즈 피아니스트 론 브랜튼, 그야말로 ‘버터 냄새’ 팍팍 나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전형일 것만 같은 배경과 이력을 지녔다. “전남 강진을 아시나요? 그야말로 시골이고 학교보다 밭일을 먼저 해야 했어요. 시골에서 어찌어찌 공부를 좀 해서 고등학교는 광주로 나와자취하며 다녔어요. 그때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냉방에서 잘 챙겨먹지 못한 게 평생의 건강을 좌우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학습능력도 또 건강도 타고나는 것인지, 김향란 대표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무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 서울로 입성한다. 그러나 ‘시골소녀’가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낯선 환경과 약한 체력 때문인지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준비 없이 그야말로 ‘어리바리’ 대학 4년을 보냈다고. 그리고 지도교수의 소개로 출판사에 취직, 2년 가까이 영어잡지를 만들었다. 영어잡지사서 광고대행사 거쳐 삼성영상사업단 기획자로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는, 당시 '트렌디한 직장의 대명사'격인 광고대행사로 옮겨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광고팀, 그리고 상사를 따라 PR팀에서 AE로 일하게 됐다. 그렇게 글로벌 감각과 문화적 감수성, 마케팅 능력을 키운 후 삼성전자 소속 나이세스(이후 삼성물산 ‘스타맥스’, 제일기획 ‘오렌지’ 레이블 등과 ‘삼성영상사업단’으로 통합. 지금의 CJ ENM 같은 회사가 일찍이 1990년대에 명멸했다고 이해하면 빠르다-필자 주)로 스카우트된다. “삼성전자 ‘나이세스’로 시작해 ‘삼성영상사업단’까지 만 5년을 일했어요. 당시 획기적 시스템이었던 삼성영상사업단이 좀더 오래 지속됐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쉬워요.” 삼성영상사업단은 음악-영화-공연 기획-제작-배급까지 ‘원스톱’으로 진행하는 ‘대중문화계 공룡’이었다. 다양한 분야, 조직에 있던 다채로운 인력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려고 하는 참이었다. 김향란 대표는 그곳에서 음악, 공연사업부에서 일을 했다. 결국 성사되진 못했지만, 막 성장을 시작하려던 국내 뮤지컬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는 해외 뮤지컬의 국내 상륙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리고 해외 유명 프로듀서, 기획사들과의 접촉과 소통을 담당한 것이 김 대표였다. 의욕적으로 출범한 삼성영상사업단이 오래 가지 못하고 ‘실업자’ 신세가 된 김향란 대표는 ‘이 김에 쉬어가자’ 싶었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어쨌든 1990년대 중반은 김 대표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시기였다. 삼성영상사업단의 퇴장과 또 다른 시작, 인생 동반자와의 운명적 만남과 결혼 등. 재즈 피아니스트 론 브랜튼과의 영화 같은 만남...소속뮤지션 대 공연기획자 김향란 대표와 ‘영원한’ 소속 뮤지션 론 브랜튼(Ronn Branton)의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는 업계에서 꽤 유명하다. 중-고교 시절 영어에 흥미가 많았던 김 대표는 당시 청소년들의 유일한 외국과의 연결고리 ‘해외펜팔’을 하던 진취적 여학생이었다. 실제, 1970년대 말 80년대 초 학생잡지를 보면 해외펜팔 광고가 늘 지면을 장식했다. “해외펜팔의 추억과 경험이 있다 보니 삼성영상사업단 시절 같은 삼성 계열사 PC통신 ‘유니텔’ 채팅방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해외 매칭사이트와 링크돼 있었더라고요. 그곳에서 세 명의 남성과 연결이 됐는데 가장 글을 잘 쓴 남성의 메시지에 응답,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 됐어요. 하하. 당시 '인터넷 국제커플 1호'라고 보도도 많이 됐었죠.” 어쩌면 숱하게 많이 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남편과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하며 김향란 대표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공연기획자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만남이라니, 그 자체로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론 브랜튼은 뮤지컬파크의 소속가수이고 김 대표는 그의 매니저 겸 공연기획자, 소속사 대표인 셈이다. 이들 부부의 시너지가 멋지게 발휘된 것이 ‘론 브랜튼의 재즈 크리스마스’ 콘서트다. 작년 12월에 18회째 공연을 마쳤고 올해 19년차, 내년엔 20주년을 맞는다. 18년간 연속 매진을 기록했고 올해 공연을 거쳐 내년 20주년 콘서트를 잘 치루는 게 중요한 계획 중 하나다. 그야말로 ‘그 여자 기획, 그 남자 공연’이다. “남편 공연이 잘 되다보니까 작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간 부산, 울산, 대구, 대전 등 주요 도시에서 다 공연을 했는데 정작 고향인 광주에서는 한 번도 못하다가 드디어 작년에 무대에 올려 다른 도시보다 더 대박 났어요. 광주지역 공연제작사에 제안서, 기획서 다 보냈는데 진행이 지지부진해 ‘이럴 거면 내가 직접 해야겠다’해서 ‘아시아문화의전당’에 대관 신청하고 ‘고향이니까 혹시 잘 안되더라도 GO~’ 했는데 공연이 잘 돼서 더 기뻤어요.” 현재 미국에서 오페라를 공부 중인 딸 도연이도 이 부부의 더 없이 멋진 작품이다. 이제 1학년인데 선배들도 서기 힘들다는 학교 오페라에 캐스팅 되는 등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기대주다. 론 브랜튼과 함께 이 신진 아티스트를 대한민국의 예술자산이 될 수 있게 잘 키우는(?) 것도 김 대표의 주요 과제이자 계획이다. 한국 뮤지컬 새 장 여는데 역할...창작뮤지컬 성공시키고파 김향란 대표의 이력에서 빼놓은 수 없는 건 초대형 해외 뮤지컬을 국내에 들여와 한국 뮤지컬의 새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2001년 라이선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책임 프로듀서를 맡아 그야말로 ‘초대박’ 흥행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나라 뮤지컬 역사를 바꿔놓은 대 사건’이라 할 만한 것으로 매출이 200억에 달했다고. 이후 ‘캐츠’ ‘사운드 오브 뮤직’ ‘42번가’ ‘미녀와 야수’ 등을 잇달아 국내 무대에 올리며 해외 뮤지컬 열풍을 일으켰다. “삼성영상사업단 시절에 이미 네트워크를 다져놓았기에 가능했어요. 처음 ‘오페라의 유령’의 경우 라이선스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협상만 1년이 걸렸을 정도로 까다로운 프로젝트였죠.” 그도 그럴 것이 대작으로서 원작회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해외 제작진이 다 내한해 공동프로듀서까지 맡았다. 해외 초대형 뮤지컬을 한국배우, 한국어로 만들겠다는 건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수많은 해외 뮤지컬들이 국내에 라이선스로 소개되기까지 김향란 대표의 현지와의 연락과 소통, 계약 성사 등 물밑 노력이 있었다. 오랜 커리어를 통한 전문성과 뛰어난 영어실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어우러진 결과다. 요즘 김향란 대표는 숨고르기 중이다. 엉겁결에 시작해 어느새 오픈 4년 차를 맞은 ‘컵스’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지키며 ‘소속 뮤지션’ 론 브랜튼을 비롯해 케이클 싱어즈 등의 공연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자살예방콘서트’ 같은 뜻깊은 취지의 공연에도 힘을 쏟고 있다. “‘컵스’를 운영하면서 요즘 자영업자의 고충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작년 하반기부터는 심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냉각됐다고 할까요. 아예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은 것 같더라고요. 처음 출발부터도 큰 욕심을 내진 않았지만 요즘 같아서는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공연기획은 제 평생의 업인 셈인데요. 역시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지만 ‘나만의 콘텐츠’는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5년 이상 준비한 창작 뮤지컬 ‘타이거’를 무대에 짧게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걸 꼭 다시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쌓은 제 노하우들을 무료로 나누는 뮤지컬 컨설팅도 해나가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오픈 전부터 손님이 막 들어선다. “원래 공연 때문에 굉장히 바쁘거나 ‘오늘 손님 없으면 빨리 들어가야지’ 할 정도로 녹초가 돼 있을 때 어떻게 아셨는지 많이들 오신다”며 김향란 대표는 빠르게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